조개를 보지 못한 척 할 건가요? 태초로 돌아갑니다...
박수, 촛불, 플라스틱 칼
오려 씀

S#1 지영의 집, 안방 (아침)

고요한 방 안. 현관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에 지영이 반쯤 눈을 뜬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오가더니 이내 은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은수 (E)
아직도 자?
자영 (E)
언니, 지영이 원래 이렇게 많이 잤었나? 이럴 애가 아닌데.
은수 (E)
이사하고 나서는 계속 잠을 못 자던데? 이참에 좀만 더 재우자.

지영의 감은 눈 위로 두 개의 목소리가 오간다. 몸을 뒤척이자 두 사람이 지영에게 다가온다.

지영 (V.O)
미안한데 나 새벽까지 마감치고 지금도 두 사람 덕분에 선잠 자고 있거든.

아침부터 남의 집에 들이닥치는 예의에 짜증난 지영이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누웠다. 이어 문 닫는 소리,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마구 얽혀 들린다. 질린 지영이 서서히 잠에 든다.

S#2 지영의 집, 안방 (낮/과거)

열어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옆집의 선명한 라디오 소리. 라디오에서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흘러나온다. 영감을 받은 지영이 노트에 메모를 적고 있다. 때마침 진동이 울리고 핸드폰 화면이 켜진다.

인서트> 친구의 메시지. [김지영 너 이사했다며 대체 언제 보여줄 거야.]

지영
(짜증) 하...

지영은 이런 연락이 지겹다. 아무리 선을 그어도 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란 뭘까. 펜을 노트 사이에 껴놓고 휴대폰을 들어 답장을 남긴다.

지영 (V.O)
아 여기 진짜 할 거 없음 ㅋㅋㅋ 너는 홍대로 이사했으면서 이 동네가 궁금하냐 언제 불러줄 거임?

S#3 카페 실내 (과거)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 앉은 지영은 사람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자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호응을 얹기도 하면서 섞여있다.

지영
(담담) 그래요?
친구
(억울한) 저도 처음에는 못 들어서 반응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
지영
에이. 그게 반응이었을 수도 있죠.

점점 머리가 어지럽다. 내일 제 생일이에요. 쉽게 입을 뗄 수 없다. 이내 테이블 위로 힘없이 쓰러지는 지영.
페이드 아웃

S#4 지영의 집, 안방 (아침)

문이 굳게 닫힌 방. 암막커튼이 쳐져있다. 곳곳에 달린 드림캐처와 솜인형이 달린 모빌, 스무 해 넘게 곁을 지켜준 낡은 곰 인형. 그 가운데 낙상 방지 안전 가드가 붙은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에서 곤히 잠든 지영. 바깥쪽으로 몸을 굴린다.

S#5 자영의 집 (과거)

제각각의 옷걸이에 걸린 무지개빛의 화려한 옷들. 각이 잡힌 듯 반듯하다. 지영이 옷 사이에 겉옷을 걸어두려 하자 손을 씻고 온 자영이 옷과 옷걸이를 빼앗아 자기 규칙대로, 손님용 옷걸이에 걸고 손님용 자리에 놓아 정리한다.

자영
(태평) 내 집이 좀 복잡하지~

자영의 환한 낯에 지영의 말문이 막힌다.

지영 (V.O)
저렇게 성실한 사람이 내 자매라니.

인서트> 지영이 자영의 규칙에 맞춰 정리하는 다른 날들.

S#6 가족의 집, 거실 (과거)

충격을 받았는지 울며 방으로 들어가는 자영. 쾅 방문 닫는 소리.

지영 (E)
그 사람이 처음으로 감정을 숨기지 않던 날을 잊지 못한다.

S#7 지영의 집, 안방 (낮)

안전 가드를 껴안은 자세로 자던 지영. 자영이 암막커튼을 걷자 지영의 위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자영 (E)
이제 진짜 일어나~ 해가 중천이다, 중천! 다 넘어가야 일어날래?

지영을 흔들어 깨우는 자영. 맥없이 흔들리다 어깨를 두드리는 자영의 손길에 눈을 뜨는 지영. 멈추지 않는 방해에 지영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지영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인서트> 충전기가 꽂혀있던 핸드폰을 집어 든다. 화면 속 시계가 11시를 가리킨다. 그 아래에 적혀있는 ‘강자영 생일’.

지영 (V.O)
그럼 그렇지. 강자영이 아무 일도 없이 찾아올 리 없다.
지영 (E)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 말했다. 저녁에 내가 간다고.
자영 (E)
응, 그래~
지영 (V.O)
분명 여러 번 당부했는데….

지영이 얼굴을 구긴다. 자영이 갖다준 물을 자연스레 받아 마시다 해맑은 눈과 마주친다. 눈을 피하는 지영.

S#8 지영의 집, 거실 (낮)

지영이 거실로 나가자 식탁에 앉아있는 은수와 은수가 끌어안은 자영이 있다. 지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은수.

S#9 카페 (낮/과거)

지영이 카페로 들어가자 나란히 앉아있는 자영과 은수가 보인다. 어색한지 은수가 지영의 눈을 피한다.

자영
인사해, 내 애인이야.
은수
(뻣뻣) 안녕하세요. 한은수라고 합니다.
지영
안녕하세요. 강자영, 아니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은수
아…. 무슨 얘기를 했을까~

은수가 말끝을 흐리며 자영의 눈치를 본다. 상황을 파악한 지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을 마신다.

자영 (E)
은수,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 만나면 말수 줄어들거든? 근데 넌 애인 동생이잖아. 아무리 내가 옆에 있어도 어색할 거야. 몇 번 더 보면 너도 금세 친해질걸?

S#10 카페 (낮/과거)

어느새 친해진 세 사람.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맞은 편에 앉은 지영에게 서류를 내미는 자영. 옆에는 은수가 앉아있고 서류에는 ‘혼인신고서’라고 쓰여 있다. 확인인 란에 인감을 찍는 지영.

지영 (E)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종종 내 생각이 나거나 내 집 냉장고 사정이 걱정되면 현관문을 넘나들었다.

S#11 지영의 집, 거실 (낮)

지영이 입을 짝 벌리며 두 사람 앞에 앉는다. 은수가 아직 잠결인 듯한 지영을 보며 웃으며 묻는다.

은수
일어났어?
지영
둘 다 언제 왔어?

S#12 골목 (저녁/과거)

수박 한 통을 들고 골목길을 걷는 지영. 찾는 곳이 있는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지영 (E)
은수 집은 우리집에서 걸어서 8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자영의 동네는 버스로 20분이나 걸리는데.

S#13 은수의 집앞 (저녁/과거)

띵동 소리에 이어 은수가 문을 열고 지영을 반갑게 맞이한다.

S#14 은수의 집, 거실 (저녁/과거)

작은 거실이 딸려있는 1.5룸. 양말을 신은 의자와 귀여운 일러스트 엽서가 붙어있는 벽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다. 은수가 싱크대 옆에서 수박을 손질하는 동안 지영은 책장을 구경하다 한 권 꺼내 의자에 앉는다.

S#15 병원 (과거)

침대에 누워있는 지영. 베개가 땀으로 축축하다. 백팩이 침대에 기대어 서 있다. 은수가 지영의 눈높이에 맞춰 선다.

은수
(걱정) 지영아, 괜찮아? 곧 링겔 놔주신대.

진심으로 걱정하며 열심히 지영을 간호하는 은수. 지영이 힘겹게 눈을 깜박인다.

지영 (E)
도장 하나 찍었다고 너무 많은 호의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들보다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는 걸 보고 나서는 그의 다정함을 의심치 않기로 다짐했다. 가까이 사는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을 마음 놓고 누렸다.

S#16 지영의 집, 거실 (낮)

식탁에는 잘 깎아놓은 복숭아가 접시에 담겨 있다. 포크 세 개도.

자영
내 생일인데 여태껏 자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오늘은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두가 행복해져야 하는 날이라고!
은수
그래, 너 자꾸 그렇게 생활 패턴 바뀌어서야 몸만 상한다니까~ (접시 톡) 복숭아 먹을래?
지영
엥. 갑자기 복숭아?
자영
세일하길래 봤더니 사과더라고. 너 사과 알러지 있잖아~ 옆에 복숭아는 세일 안 하길래 그냥 오려고 했는데 이은수가 그거라도 사 가자길래 샀어. 와서 먹어.
은수
(장난) 자영아~ 자취생한테 과일이 얼마나 귀중한데~ 우리 다음에 올 때는 삼계탕 사다 주자~ 애가 날이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지잖아~
자영
어어? 한은수, 너는 본가 갈 때도 이런 거 싸가더니?

지영이 두 사람과의 대화에서 처음 듣는 단어를 되짚었다.

지영
(중얼) 본가?
자영
이거 잘 보이려는 속셈 아냐? 이미 너는 강지영 마음 다 열고 들어갔다니까?
은수
그걸 단번에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챙겨주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치, 지영아~
지영
(당황) 어? 어~ 은수 언니가 부담스러우면 말하랬는데 받아먹으면 그것대로 좋은 거 같아서 그냥….
자영
뭐야. 강지영, 너 한은수 너무 뽑아먹는 거 아니야?

웃음 소리. 은수가 지영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지영도 따라 끄덕인다. 눈치가 빠른 자영이 은수의 무릎에 냉큼 앉는다.

은수
아, 뭔데~
자영
뭐기는. 너네가 일 벌이는 거 같아서 그런다, 왜.

자영이 은수의 입술을 잡고 흔든다. 그새 지영이 방에서 고깔모자를 들고나와 자영에게 씌운다. 어찌나 인기척이 없던지 잔뜩 놀라는 자영.

자영
응? 이게 뭐야?
은수
(거울 내밀며) 이거 봐봐, 자영아~

인서트> 거울에는 ‘생일 축하해, 강자영~’이라는 문장과 은수가 돌보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생일 고깔을 쓴 자영의 모습. 놀란 얼굴이 점점 행복으로 물든다.

자영
이게 뭐야~

자영이 거울을 잡자 튀어나온 뒤편이 손에 걸린다. 인서트> 거울 뒤편에 차 키가 박스테이프로 붙어있다. 자영이 키를 떼지도 않고 거울을 째로 들고선 두 사람을 바라본다.

자영
(울먹) 이거 통째로 가져가도 돼?

감동 받은 자영. 일평생 갖고 싶었던 차를 선물 받아 이로 말할 수 없이 기뻐보인다. 뿌듯한 은수가 덩달아 울먹거린다. 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S#17 은행 (낮/과거)

한산한 동네 은행. 지영과 은수가 나란히 앉아 호출을 기다린다.

지영
(감탄) 와~ 너도 참 대단하다. 원래 둘이 같이 살 집 사고 싶어 했잖아. 강자영은 이런 사람 어떻게 찾았대.
은수
(웃음) 나 좀 멋져?
은행원
한은수님, 들어오세요~
은수
(긴장) 네.
지영
(은수를 보고) 당연히 됐을 텐데 뭐 그렇게 긴장을 해. 다녀오셔, 새언니~

자리에서 일어난 은수가 지영에게 맞인사를 하고 은행원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은행원
한은수님과 강자영님, 신혼부부 대출 신청 완료되셨고요. (종이를 내민다.) 서류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은수
(볼가가 상기되어) 아, 네...!

S#18 지영의 집, 거실 (낮)

자영
(코를 훌쩍거리며) 은수, 너 요즘 집에서만 밥 먹는 이유가 다 이거 때문이었어?
은수
(장난스럽게) 에이, 뭘. 너 맨날 퇴근하고 회사 근처에서 자고 오니까 피곤하잖아.
자영
(입을 비죽이며) 외식하자는 거 그렇게 내 밥 먹고 싶다더니!
지영
(뻔뻔하게) 나도 큰맘 먹고 저축 액수 줄인 거니까. 가끔 빌려주기다?
자영
(웃으면서) 그건 생각해보고. 둘 다 너무 고마워.
지영 (E)
자영은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다. 주위에 온기를 나눈다고 스스로에게는 늘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미는 이 사람이 잠만큼은 푹 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영이 은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다. 복숭아가 사라진 접시에 그려져 있는 샛노란 벼가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자영
이거 벼야?
지영
응, 고등학교 친구가 이사 기념으로 선물해줬어. 멋지지?

이어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 문이 열리고 양손에 보따리를 든 정숙이 들어왔다.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을 붉히는 지영.

은수
(반기는 듯 환하게) 아, 어머니! 오셨어요?
자영
(현관으로 나가며) 왔어? 연락하라니까.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여기까지 들고 왔어.
지영 (E)
우리 집에 정숙이 들어온다고?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단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두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는 지영.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는다. 정숙은 현관에 짐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닦고 세면대에 누워있는 치약을 세워놓았다. 자영이 보따리를 풀고 음식이 담긴 밀폐용기를 꺼냈고 은수는 용기를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지영은 그 가운데에서 멍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다.

S#19 가족의 집, 거실 (밤/과거)

정숙이 거실 식탁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다.

지영 (E)
어제만 해도 정숙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숙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 자영이, 걔는 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어가는데 왜 남자친구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을까? (원망스럽게)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 소식도 들려주고 해야되는 거 아냐? (타박하며) 지영이는 너는, 언니처럼 여자랑만 놀러 다니지 말고 남자도 만나고 그래, 응? 친구 둬 봤자 그거 하등 쓸모 없다?
지영 (V.O)
(체념한 듯) 응, 알았어요. 그럴게.

지영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S#20 지영의 집, 거실 (낮)

금세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네 사람 분의 수저를 놓는 은수. 밀폐용기에 담긴 검은 잡곡밥을 푸는 정숙. 된장찌개를 끓여 식탁에 올리는 자영. 정숙이 안쪽 자리에 앉아 지영이 앉기를 기다린다. 떨떠름하게 옆자리에 앉는 지영. 모두가 자리에 앉자 식사를 시작한다.

자영
와,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엄마가 해온 거야? 맛이 평소랑 다른데?
정숙
(넉살좋게) 아니~ 그 있잖아. 윗윗집에 자기 부인이랑 같이 사는 분. 전에 말하지 않았니?
은수
(반갑다는 듯) 어어. 저는 그 얘기 들었어요!

수업을 듣는 것처럼 손을 번쩍 드는 은수. 정숙이 열정적인 은수를 보고 웃는다. 자영은 영 모르겠다는 눈치다. 화기애애한 사람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지영은 점점 몸을 웅크렸다.

정숙
(은수의 어깨를 가볍게 친다) 얘! 역시 은수가 좀 아네. 그분이랑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쳐서 인사하다 보니까 친해졌다고 했잖아.
지영 (E)
이상하다. 은수가 정숙과 얘기해보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분명 어제 통화에서는 은수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영의 친구 아무개가 눈치 없는 자영을 꼬셔다 제 뒷바라지를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정숙은 누군지도 모르는 은수를 미워했다. 나는 정숙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진위를 설명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기 싫었다. 레즈비언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자영의 사랑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정숙이 훼방놓는다 생각하면 기가 찼다. 무언가를 아낀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친해졌다고?

불안한 지영이 은수의 표정을 살핀다. 은수는 편안해보인다. 고개를 끄덕이고 정숙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몇 년 본 것처럼 은수의 팔을 새침하게 치는 정숙. 지영은 의아하다.

정숙
(신나는지 빨라진 말투) 얼마 전에는 팥빙수 먹으려고 팥을 쒔는데 너무 많이 남은 거야. 버릴 수는 없으니까 아까워서 그 집 가서도 몇 번 해 먹었지. 그러면서 며칠 뒤에 자영이, 네 생일이라니까 자기들이 받은 게 많다고 잘하는 음식을 해주시겠다지, 뭐니?
은수
(찰떡같이 받아친다) 아잇, 그분들이 뭘 좀 아시네! 우리 어머니가 끓인 팥이 진국이라니까요~ 저 지난번에 해주셨던 팥죽 먹고 잔병치레 싹 나았잖아요.

자영은 그저 훈훈하게 지켜보고 있다. 은수의 밥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기도 하면서.

지영
(자영을 보고 입만 움직여) 둘이 꼭 친구 같네.
자영
(따라 소근거린다) 그러니까 말야.

S#21 지영의 집, 거실 (낮)

어느새 식사가 막바지다. 자영이 된장찌개를 바닥까지 긁어먹고 있다. 지영의 빈 밥그릇을 보고 정숙이 뿌듯한지 웃는다.

정숙
(뿌듯하게) 잘 먹네, 우리 강지~

그 말을 들은 지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치운다. 꼭 소스라치게 놀란 듯이. 자영이 수저를 내려놓자 자영과 은수, 정숙도 함께 식탁을 정리했다. 한 칸짜리 개수대가 꽉 찼다.

정숙
자, 이제 생일인데 케이크 먹어야지!

지영이 냉장고를 열자 케이크 상자가 한 칸 가득 들어차 있다. 케이크를 꺼내 식탁 한가운데에 올리고 정숙이 곰돌이 모양 초를 꽂는다. 은수는 와인을 꺼내 잔에 따라 세팅한다. 자영은 이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다. 지영이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 케이크 옆에 둔다. 불을 붙이고 서로가 눈치를 보다 어설픈 박수 소리가 점점 모양새를 갖춰간다.

모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지영 (E)
우리는 그저 자영이 행복하게 웃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입을 모아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내 이웃에게도 오늘의 기쁨만큼은 전해졌으면 해서 들뜬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오늘의 바람은 자영을 위해 불기를.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앞으로도 즐거운 삶을 살기를. 안정적인 궤도로 날아가기를. 세상이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덜 날카로울 수 있기를 도와달라고.
모두
사랑하는 자영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끈다. 기분 좋은 어둠이 집안 곳곳에 스민다.

정숙
생일 축하한다~
은수
생일 축하해~
지영
생일 축하해, 언니~
자영
다들 고마워.

박수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S#22 지영의 집, 안방 (낮)

창밖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진행자 (V.O)
다음으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이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영이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있다 뒤척거린다. 이어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켠다. 은은한 노란색 적막이 방을 맴돈다.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 SNS에 들어가 피드를 죽죽 내린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 먹는 음식보다 푸짐한 양의 사진들이 올라온다. 자영이 옆 동네 음식점에서 자영과 자주 보는 은수라는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멈춘다. 자영과 은수가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다. 사진을 넘기자 ‘무지개 공주 강자영 탄생일’이라고 쓰인 현수막 밑에서 코에 생크림을 얹은 자영이 울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게시글의 내용은 ‘행복했던 생일! 축하해준 모두 고마워요~’. 지영이 침대에서 한 바퀴를 굴러 빛을 등지고 댓글을 남긴다.

지영 (V.O)
잘 지내네 은수언니 이 근처에 산다더니 이 정도면 우리 집 앞 아냐? ㅋㅋㅋㅋ 생일 축하한다
지영 (E)
그 식당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우리 집이다. 자영이 우리 집에 오지는 않았다. 한 지붕 아래서 아침을 보낸 지 5년째인 두 사람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우리 집에 찾아와 서프라이즈를 꾸미는 일은 없겠지.

연달아 오는 메신저 알림음이 가라앉은 공기를 깬다. 지영과 자영, 정숙이 함께 있는 채팅방이다. 화사한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둔 정숙과 지영의 대화 아래에 새로운 대화가 올라온다.

정숙 (V.O)
(지겹다는 듯) 너 아직도 걔랑 있어? 네 생일인데 집에는 안 오고. 자꾸 어딜 돌아다녀. 엄마 속상하다. 해둔 밥 상해서 버리기 전에 들러. 걔는 두고 오고.

문자 알림음. ‘배정숙 님이 보내신 청주산 사과 1kg이 강지영 님의 집 앞에 도착했어요!’ 문자를 확인한 지영이 지겹다는 듯 신음하며 이부자리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