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트> 거울에는 ‘생일 축하해, 강자영~’이라는 문장과 은수가 돌보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생일 고깔을 쓴 자영의 모습. 놀란 얼굴이 점점 행복으로 물든다.
자영
이게 뭐야~
자영이 거울을 잡자 튀어나온 뒤편이 손에 걸린다.
인서트> 거울 뒤편에 차 키가 박스테이프로 붙어있다.
자영이 키를 떼지도 않고 거울을 째로 들고선 두 사람을 바라본다.
자영
(울먹) 이거 통째로 가져가도 돼?
감동 받은 자영. 일평생 갖고 싶었던 차를 선물 받아 이로 말할 수 없이 기뻐보인다. 뿌듯한 은수가 덩달아 울먹거린다. 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S#17 은행 (낮/과거)
한산한 동네 은행. 지영과 은수가 나란히 앉아 호출을 기다린다.
지영
(감탄) 와~ 너도 참 대단하다. 원래 둘이 같이 살 집 사고 싶어 했잖아. 강자영은 이런 사람 어떻게 찾았대.
은수
(웃음) 나 좀 멋져?
은행원
한은수님, 들어오세요~
은수
(긴장) 네.
지영
(은수를 보고) 당연히 됐을 텐데 뭐 그렇게 긴장을 해. 다녀오셔, 새언니~
자리에서 일어난 은수가 지영에게 맞인사를 하고 은행원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은행원
한은수님과 강자영님, 신혼부부 대출 신청 완료되셨고요. (종이를 내민다.) 서류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은수
(볼가가 상기되어) 아, 네...!
S#18 지영의 집, 거실 (낮)
자영
(코를 훌쩍거리며) 은수, 너 요즘 집에서만 밥 먹는 이유가 다 이거 때문이었어?
은수
(장난스럽게) 에이, 뭘. 너 맨날 퇴근하고 회사 근처에서 자고 오니까 피곤하잖아.
자영
(입을 비죽이며) 외식하자는 거 그렇게 내 밥 먹고 싶다더니!
지영
(뻔뻔하게) 나도 큰맘 먹고 저축 액수 줄인 거니까. 가끔 빌려주기다?
자영
(웃으면서) 그건 생각해보고. 둘 다 너무 고마워.
지영 (E)
자영은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다. 주위에 온기를 나눈다고 스스로에게는 늘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미는 이 사람이 잠만큼은 푹 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영이 은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다. 복숭아가 사라진 접시에 그려져 있는 샛노란 벼가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자영
이거 벼야?
지영
응, 고등학교 친구가 이사 기념으로 선물해줬어. 멋지지?
이어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 문이 열리고 양손에 보따리를 든 정숙이 들어왔다.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을 붉히는 지영.
은수
(반기는 듯 환하게) 아, 어머니! 오셨어요?
자영
(현관으로 나가며) 왔어? 연락하라니까.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여기까지 들고 왔어.
지영 (E)
우리 집에 정숙이 들어온다고?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단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두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는 지영.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는다. 정숙은 현관에 짐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닦고 세면대에 누워있는 치약을 세워놓았다. 자영이 보따리를 풀고 음식이 담긴 밀폐용기를 꺼냈고 은수는 용기를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지영은 그 가운데에서 멍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다.
S#19 가족의 집, 거실 (밤/과거)
정숙이 거실 식탁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다.
지영 (E)
어제만 해도 정숙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숙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 자영이, 걔는 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어가는데 왜 남자친구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을까? (원망스럽게)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 소식도 들려주고 해야되는 거 아냐? (타박하며) 지영이는 너는, 언니처럼 여자랑만 놀러 다니지 말고 남자도 만나고 그래, 응? 친구 둬 봤자 그거 하등 쓸모 없다?
지영 (V.O)
(체념한 듯) 응, 알았어요. 그럴게.
지영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S#20 지영의 집, 거실 (낮)
금세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네 사람 분의 수저를 놓는 은수. 밀폐용기에 담긴 검은 잡곡밥을 푸는 정숙. 된장찌개를 끓여 식탁에 올리는 자영. 정숙이 안쪽 자리에 앉아 지영이 앉기를 기다린다. 떨떠름하게 옆자리에 앉는 지영. 모두가 자리에 앉자 식사를 시작한다.
자영
와,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엄마가 해온 거야? 맛이 평소랑 다른데?
정숙
(넉살좋게) 아니~ 그 있잖아. 윗윗집에 자기 부인이랑 같이 사는 분. 전에 말하지 않았니?
은수
(반갑다는 듯) 어어. 저는 그 얘기 들었어요!
수업을 듣는 것처럼 손을 번쩍 드는 은수. 정숙이 열정적인 은수를 보고 웃는다. 자영은 영 모르겠다는 눈치다. 화기애애한 사람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지영은 점점 몸을 웅크렸다.
정숙
(은수의 어깨를 가볍게 친다) 얘! 역시 은수가 좀 아네. 그분이랑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쳐서 인사하다 보니까 친해졌다고 했잖아.
지영 (E)
이상하다. 은수가 정숙과 얘기해보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분명 어제 통화에서는 은수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영의 친구 아무개가 눈치 없는 자영을 꼬셔다 제 뒷바라지를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정숙은 누군지도 모르는 은수를 미워했다. 나는 정숙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진위를 설명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기 싫었다. 레즈비언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자영의 사랑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정숙이 훼방놓는다 생각하면 기가 찼다. 무언가를 아낀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친해졌다고?
불안한 지영이 은수의 표정을 살핀다. 은수는 편안해보인다. 고개를 끄덕이고 정숙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몇 년 본 것처럼 은수의 팔을 새침하게 치는 정숙. 지영은 의아하다.
정숙
(신나는지 빨라진 말투) 얼마 전에는 팥빙수 먹으려고 팥을 쒔는데 너무 많이 남은 거야. 버릴 수는 없으니까 아까워서 그 집 가서도 몇 번 해 먹었지. 그러면서 며칠 뒤에 자영이, 네 생일이라니까 자기들이 받은 게 많다고 잘하는 음식을 해주시겠다지, 뭐니?
은수
(찰떡같이 받아친다) 아잇, 그분들이 뭘 좀 아시네! 우리 어머니가 끓인 팥이 진국이라니까요~ 저 지난번에 해주셨던 팥죽 먹고 잔병치레 싹 나았잖아요.
자영은 그저 훈훈하게 지켜보고 있다. 은수의 밥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기도 하면서.
지영
(자영을 보고 입만 움직여) 둘이 꼭 친구 같네.
자영
(따라 소근거린다) 그러니까 말야.
S#21 지영의 집, 거실 (낮)
어느새 식사가 막바지다. 자영이 된장찌개를 바닥까지 긁어먹고 있다. 지영의 빈 밥그릇을 보고 정숙이 뿌듯한지 웃는다.
정숙
(뿌듯하게) 잘 먹네, 우리 강지~
그 말을 들은 지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치운다. 꼭 소스라치게 놀란 듯이. 자영이 수저를 내려놓자 자영과 은수, 정숙도 함께 식탁을 정리했다. 한 칸짜리 개수대가 꽉 찼다.
정숙
자, 이제 생일인데 케이크 먹어야지!
지영이 냉장고를 열자 케이크 상자가 한 칸 가득 들어차 있다. 케이크를 꺼내 식탁 한가운데에 올리고 정숙이 곰돌이 모양 초를 꽂는다. 은수는 와인을 꺼내 잔에 따라 세팅한다. 자영은 이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다. 지영이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 케이크 옆에 둔다. 불을 붙이고 서로가 눈치를 보다 어설픈 박수 소리가 점점 모양새를 갖춰간다.
모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지영 (E)
우리는 그저 자영이 행복하게 웃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입을 모아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내 이웃에게도 오늘의 기쁨만큼은 전해졌으면 해서 들뜬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오늘의 바람은 자영을 위해 불기를.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앞으로도 즐거운 삶을 살기를. 안정적인 궤도로 날아가기를. 세상이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덜 날카로울 수 있기를 도와달라고.
모두
사랑하는 자영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끈다. 기분 좋은 어둠이 집안 곳곳에 스민다.
정숙
생일 축하한다~
은수
생일 축하해~
지영
생일 축하해, 언니~
자영
다들 고마워.
박수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S#22 지영의 집, 안방 (낮)
창밖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진행자 (V.O)
다음으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이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영이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있다 뒤척거린다. 이어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켠다. 은은한 노란색 적막이 방을 맴돈다.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 SNS에 들어가 피드를 죽죽 내린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 먹는 음식보다 푸짐한 양의 사진들이 올라온다. 자영이 옆 동네 음식점에서 자영과 자주 보는 은수라는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멈춘다. 자영과 은수가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다. 사진을 넘기자 ‘무지개 공주 강자영 탄생일’이라고 쓰인 현수막 밑에서 코에 생크림을 얹은 자영이 울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게시글의 내용은 ‘행복했던 생일! 축하해준 모두 고마워요~’. 지영이 침대에서 한 바퀴를 굴러 빛을 등지고 댓글을 남긴다.
지영 (V.O)
잘 지내네 은수언니 이 근처에 산다더니 이 정도면 우리 집 앞 아냐? ㅋㅋㅋㅋ 생일 축하한다
지영 (E)
그 식당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우리 집이다. 자영이 우리 집에 오지는 않았다. 한 지붕 아래서 아침을 보낸 지 5년째인 두 사람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우리 집에 찾아와 서프라이즈를 꾸미는 일은 없겠지.
연달아 오는 메신저 알림음이 가라앉은 공기를 깬다. 지영과 자영, 정숙이 함께 있는 채팅방이다. 화사한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둔 정숙과 지영의 대화 아래에 새로운 대화가 올라온다.
정숙 (V.O)
(지겹다는 듯) 너 아직도 걔랑 있어? 네 생일인데 집에는 안 오고. 자꾸 어딜 돌아다녀. 엄마 속상하다. 해둔 밥 상해서 버리기 전에 들러. 걔는 두고 오고.
문자 알림음. ‘배정숙 님이 보내신 청주산 사과 1kg이 강지영 님의 집 앞에 도착했어요!’ 문자를 확인한 지영이 지겹다는 듯 신음하며 이부자리에서 일어난다.